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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주가가 고공행진하던 작년 이맘때, 저는 뒤늦게 올라탔다가 지금도 속이 쓰립니다. 사놓고 오르면 더 사고 싶고, 떨어지면 손이 굳어서 못 팝니다. 그러다 박소연님이 쓴 『독하게 돈 공부』 내용을 접했는데, 이게 단순한 재테크 책이 아니었습니다. 수학자들이 카지노를 털러 간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결국 제가 왜 항상 돈을 잃는지까지 설명이 됐습니다.

천재들과 켈리 공식
클로드 섀넌이라는 이름, 처음엔 저도 AI 챗봇 이름인 줄만 알았습니다. 실제로 앤스로픽이 자사 AI 서비스에 이 이름을 붙인 건, 정보 이론의 아버지인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을 기리기 위해서입니다. 섀넌은 1937년 석사 논문에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0과 1, 즉 이진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론의 토대를 처음 세운 사람입니다. 디지털 세상의 설계자인 셈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수학자 에드워드 소프(Edward Thorp)와 손을 잡고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실제로 잠입합니다. 소프는 블랙잭에서 카드 카운팅(card counting), 즉 이미 뽑혀 나온 카드를 머릿속으로 추적해 남은 패의 확률을 계산하는 방법으로 딜러를 이길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카드 카운팅이란, 블랙잭처럼 뽑힌 카드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게임에서는 매 라운드마다 확률이 달라지는 점을 이용해 유리한 순간에 베팅 크기를 키우는 전략입니다. 이게 얼마나 파급력이 컸냐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측이 대책 회의를 열고 아예 사용하는 카드를 한 벌에서 여덟 벌로 늘려버릴 정도였습니다.
섀넌은 소프의 이론을 검증해 주면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맞추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얼마를 거는 게 맞아?" 이게 핵심입니다. 베팅 사이즈를 어떻게 정하느냐의 문제는 벨 연구소(Bell Labs)의 존 켈리(John Kelly)가 수학적으로 정리했는데, 이게 바로 켈리 공식(Kelly Criterion)입니다. 켈리 공식이란, 장기적으로 자산을 가장 빠르게 불릴 수 있는 최적의 베팅 비율을 계산하는 공식입니다. 이길 확률 60%, 질 확률 40%인 게임이라면 60에서 40을 뺀 20%, 즉 전 재산의 20%만 베팅하는 게 이론적으로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결론입니다.
제가 처음 이걸 접했을 때 솔직히 좀 황당했습니다. 6할이 이기는 판인데 왜 20%밖에 못 거냐고. 그런데 켈리의 논리는 단호합니다. 파산의 수학(Gambler's ruin)이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파산의 수학이란, 자산이 아무리 커도 한 번이라도 전 재산을 잃으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수학적 원리입니다. 100억이 있어도 마지막에 0을 한 번 곱하면 결과는 0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잃을 가능성이 있는 한, 올인은 절대 안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소프는 나중에 실제 운용사를 차려서 켈리 공식을 적용했는데, 주식 시장은 카지노보다 변수가 훨씬 많다는 걸 깨닫고 하프 켈리(Half Kelly), 즉 켈리 공식이 제시하는 비율의 절반만 베팅하는 방식으로 더 보수적으로 운용합니다. 그 덕분에 1987년 블랙 먼데이에 대부분의 운용사가 파산할 때 혼자 살아남았습니다(출처: Wikipedia - Edward O. Thorp).
- 켈리 공식: 이길 확률 - 질 확률 = 최적 베팅 비율 (승률 60%면 20%만 베팅)
- 파산의 수학: 전 재산에 0을 곱하는 순간 자산은 0이 된다. 올인은 절대 금지
- 하프 켈리: 실제 시장에서는 켈리 공식 비율의 절반만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
- 현금 보유: 언제든 다시 시장에 입장할 수 있는 '입장권'을 남겨두어야 한다
섀넌의 도깨비, 리밸런싱
섀넌은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실험을 제안합니다. 주가가 오르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는, 그냥 박스권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자산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하루는 100% 오르고, 다음 날은 50% 내립니다. 이 자산만 보유하고 있으면 제자리걸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체 자산의 절반은 이 주식에, 절반은 현금으로 유지하면서 매번 리밸런싱(rebalancing)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리밸런싱이란, 보유 자산의 비율이 목표치에서 벗어날 때마다 사고팔아서 원래 비율로 되돌리는 행위입니다.
주식이 100% 올라서 비중이 커지면 일부를 팔아 현금으로 돌리고, 주식이 반토막 나서 비중이 줄면 현금으로 주식을 사들입니다. 이걸 기계적으로 반복하면, 시장이 전혀 오르지 않아도 복리 효과로 수익이 쌓입니다. 섀넌이 이를 두고 도깨비 같다고 표현했고, 이게 바로 섀넌의 도깨비(Shannon's Demon)입니다. 섀넌의 도깨비란, 오르지 않는 자산도 정기적 리밸런싱만으로 장기 복리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출처: MIT - Claude Shannon Archive).
물론 상승장에서는 그냥 들고만 있는 바이 앤 홀드(Buy and Hold)가 이론상 수익률이 더 높습니다. 제가 직접 숫자를 놓고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매달 1%씩 오르는 상황에서 섀넌의 도깨비를 적용하면 복리 수익의 절반 정도만 가져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이 상승장인지 박스권인지, 하락장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25년 경력의 애널리스트도 2007년 9월 고점에서 팔기 싫었던 주식을 어쩔 수 없이 팔았는데 그게 진짜 고점이었고, 그 가격이 회복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습니다. 시장을 예측하는 건 전문가도 어렵다는 걸 이 책의 사례에서 잘 보여줍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저의 투자 습관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HTS 봉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각이 사라집니다. 빨간 봉이 연속으로 나오면 뭔가 사야 할 것 같고, 파란 봉이 연속으로 나오면 손이 떨립니다. 이건 논리가 아니라 본능입니다. 인간의 뇌는 시세 변동을 수풀에서 나타나는 사자처럼 받아들입니다. 수백만 년 전 파충류가 가졌던 생존 본능인 변연계가 작동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업 투자로 10년 넘게 살아남은 선배가 시세를 하루 한 번, 네이버에서만 확인한다는 이야기가 처음엔 황당하게 들렸는데 지금은 완전히 이해됩니다. 시세를 자주 보면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결국 섀넌이 주식으로 큰돈을 번 것도 기발한 트레이딩 기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텔레다인(Teledyne), 휴렛팩커드(Hewlett-Packard), 모토롤라(Motorola), 이 세 종목을 자기가 가장 잘 아는 분야, 자기 친구들이 직접 일하는 기업에 수십 년간 장기 보유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느 정도 잘 아는 분야를 두고, 뉴스에서 유행한다는 종목만 따라다녔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켈리 공식은 주식 투자에 그대로 쓸 수 있나요?
A. 주식 시장은 블랙잭과 달리 변수가 훨씬 많아서 정확한 승률을 계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에드워드 소프 본인도 실전에서는 켈리 공식이 제시하는 비율의 절반, 즉 하프 켈리를 적용했습니다. 공식보다는 "전 재산을 한 번에 걸지 않는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 더 현실적입니다.
Q. 섀넌의 도깨비 리밸런싱은 얼마나 자주 해야 하나요?
A. 섀넌은 특정 주기보다 목표 비율에서 일정 이상 벗어날 때 리밸런싱하는 방식을 이론적 모델로 삼았습니다. 실제로는 매달 또는 매 분기 한 번씩 기계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감정 개입을 줄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매매 수수료가 낮아진 지금 환경에서는 비용 부담도 크지 않습니다.
Q. 40대부터 투자 원칙을 세우는 게 너무 늦은 건 아닌가요?
A. 오히려 최적의 시점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20~30대는 시간이 많은 대신 경험이 부족하고, 40대는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지 이제 감이 잡히는 시기입니다. 복리의 힘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기에 충분히 이른 나이입니다.
Q. 현금을 얼마나 들고 있어야 하나요?
A. 켈리 공식과 섀넌의 도깨비 이론 모두 일정 비율의 현금 보유를 전제로 합니다. 섀넌은 이론상 50%를 현금으로 유지했고, 실전에서는 자신이 상승장이라고 확신하는 정도에 따라 주식 비중을 75%까지 높이는 방식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비율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살 수 있는 입장권을 남긴다"는 원칙 자체입니다.
Q. 레버리지 ETF에 섀넌의 도깨비를 적용하면 어떻게 되나요?
A. 오히려 역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레버리지 ETF는 변동성 드래그(volatility drag), 즉 등락이 반복될 때마다 수익률이 원금 아래로 서서히 녹아내리는 현상이 극대화됩니다. 원금이 오르지도 않는 횡보장에서 레버리지를 쓰면 섀넌의 도깨비가 수익을 만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자산을 갉아먹는 구조가 됩니다.
결론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따로 있습니다. 섀넌과 소프는 룰렛 하나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8개월을 지하실에서 보냈고, 구두에 컴퓨터를 숨겨 바느질해가며 목숨을 걸고 카지노에 들어갔습니다. 그 정도로 독하게 했습니다. 저는 반도체 주가가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뒤늦게 올라타고 뒤늦게 불안해하면서, 과연 얼마나 독하게 공부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솔직히 답을 못 하겠습니다.
오늘 당장 HTS 알림을 하나 줄이고, 시세 확인 횟수를 하루 한 번으로 제한하는 것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의 기업 한 곳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입니다.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 결국 천재들이 수십 년간 도달한 결론은 이 단순한 원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