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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로봇 기업이 체육관에 수백 명이 모여 하루 20시간씩 로봇에게 동작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 장면이 반도체 시장의 지금과 정확히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양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이 AI 시대에도 통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국 반도체가 그 파고 앞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이번 글에서 짚어보겠습니다.

인해전술, 로봇 데이터 전쟁에서도 통한다
여러분은 쿵푸 동작을 따라 하는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영상을 본 적 있으신가요? 화려한 퍼포먼스 뒤에 놀라운 인프라가 숨어 있습니다. 제가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피지컬 AI(Physical AI) 모델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피지컬 AI란 텍스트가 아닌 실제 물리적 환경에서 사람의 동작과 상호작용 방식을 학습하는 AI를 말합니다. 문제는 그 학습 데이터가 인터넷에 없다는 겁니다. 챗GPT나 클로드 같은 언어 모델은 온라인의 방대한 텍스트를 먹고 자라지만, 로봇은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여 만든 동작 데이터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한 로봇 스타트업은 이 문제를 인해전술로 돌파하고 있었습니다. 체육관 규모의 공간에 수백 명의 젊은 인턴들이 모여 각자 짝이 된 로봇과 함께 차 뚜껑 열기, 찻잎 퍼넣기, 물 끓이기 같은 일상 동작을 하루 최대 20시간씩 반복합니다. 그 동작 데이터를 영상과 센서 신호를 동기화해 하나의 패키지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런 공장이 중국 전역에 열 곳이 넘는다고 하니, 규모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조금 어렵습니다.
이게 한국에서 가능하냐고요? 가능은 합니다. 다만 중국이 천만 명을 투입할 때 한국은 50만 명이 한계입니다. 인구 구조가 다르고, 노동 문화가 다르고, 그 경쟁의 기울기 자체가 다릅니다. 저는 이 상황이 단순히 로봇 분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불안했습니다.
- 피지컬 AI 학습에는 텍스트가 아닌 실물 동작 데이터가 필수
- 중국은 전국 10여 곳 공장에서 수천 명이 하루 20시간씩 데이터 생성
- 데이터 확보 속도에서 한·중 간 구조적 격차가 이미 벌어지고 있음
D램 수급, HBM이 범용 메모리 가격을 올린 이유
스마트폰 값이 오르고, 노트북 메모리 가격이 뛰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HBM이 잘 팔리는 게 왜 내 폰 값에까지 영향을 주지?"라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신가요? 저도 처음엔 그 연결고리가 명확하지 않았는데, 이 구조를 이해하고 나서는 꽤 놀랐습니다.
핵심은 HBM(High Bandwidth Memory)이 D램과 별개의 제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HBM이란 여러 장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GPU에 붙여 초고속 데이터 전송을 가능하게 하는 메모리로, AI 연산의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설계된 제품입니다. 문제는 HBM 하나를 만들려면 D램 유닛이 최소 3개에서 6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HBM 생산을 늘리면 같은 팹(Fab), 즉 반도체 생산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 일반 D램 물량이 그만큼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여기에 더해 AI 데이터 센터가 HBM뿐 아니라 일반 D램 자체도 엄청난 양으로 필요로 합니다. 특히 LPDDR(Low Power DDR)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습니다. LPDDR이란 스마트폰처럼 배터리로 구동하는 기기를 위해 설계된 저전력 D램인데, 데이터 센터가 전력 소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규격을 채택하기 시작하면서 수요처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저의 생각은 이런 식으로 전혀 다른 용도가 겹치면 공급 충격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옵니다.
결국 AI 데이터 센터와 스마트폰이 같은 D램 풀(pool)을 두고 경쟁하고 있고, 공급은 HBM 쪽으로 쏠려 있으니 범용 D램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삼성전자 실적이 강하게 나오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2025년 1분기에도 시장 예상 범위 안에서 견조한 실적을 기록했으며(출처: 삼성전자 IR), 3분기에는 가격 상승 효과가 더 본격적으로 반영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초격차, 양적 확장만으로는 부족한 이유
이 상황을 보면서 이차전지 시장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한국 배터리 3사의 합산 점유율이 중국의 두 배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CATL 한 곳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라는 "저부가가치" 기술로 시작한 중국이 규모의 경제와 소재 공급망 장악을 통해 결국 시장 전체를 뒤집어 버린 사례입니다. D램도 그 경로를 그대로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솔직히 더 무섭습니다.
CXMT는 중국의 대표적인 D램 메이커입니다. 작년까지 D램 시장 4위였던 이 회사가 올해 3위 진입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며, 마이크론의 자리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물량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세대 기술 격차로 따지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비 아직 2~3세대 뒤처져 있지만, 지금 같은 D램 품귀 상황에서는 이전 세대 칩도 팔립니다. 애플이 미국 정부에 CXMT 제품 구매 허용을 요청한 것도 이 맥락입니다(출처: Reuters). 저부가가치가 영원히 저부가가치가 아니라는 배터리 교훈이 반도체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부의 메가 프로젝트가 생산 용량 확대, 즉 수평 확장에 집중돼 있다면, 이제는 수직 방향의 전략도 함께 가야 합니다. 메모리 파운드리라는 개념이 그 방향입니다. 메모리 파운드리란 AI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자체 설계한 칩에 맞춰 D램을 맞춤 제작하는 방식으로, 표준 규격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기존 방식과 구별됩니다.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같은 회사들이 자체 AI 칩을 만들고 그에 최적화된 메모리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 수요에 가장 빠르게 응답하는 쪽이 다음 격차를 만들게 됩니다.
큰 조직은 변화에 느립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글로벌 탑 스케일 기업이고, 그만큼 기민하게 움직이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내 스핀오프 조직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모험적인 R&D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단순한 조직론이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 읽힙니다.
- CXMT는 저세대 D램으로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는 중
- 메모리 파운드리: AI 칩 설계에 맞춘 맞춤형 D램 생산 방식
- 수평 확장(생산량)과 수직 심화(맞춤화) 두 축을 동시에 가야 초격차 유지 가능
- 이차전지 시장의 역전 사례를 반도체에서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전략 전환 필요
자주 묻는 질문
Q. HBM을 많이 만들면 왜 일반 D램 가격이 오르나요?
A. HBM은 D램 유닛을 3~6개 쌓아서 만드는 제품이라, HBM 생산을 늘리면 같은 팹에서 생산할 수 있는 일반 D램이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공급이 줄어든 상태에서 AI 데이터 센터까지 D램 수요를 끌어당기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HBM과 일반 D램의 공급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Q. CXMT D램이 삼성·하이닉스 제품보다 뒤처지는데 왜 위협이 되나요?
A. 지금처럼 D램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이전 세대 칩도 팔립니다. 애플이 CXMT 제품 구매 허용을 미국 정부에 요청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저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에 진입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면 이차전지처럼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경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핵심 위협입니다.
Q. 메모리 파운드리가 기존 메모리 사업과 다른 점이 뭔가요?
A. 기존 메모리 사업은 표준 규격 제품을 대량 생산해 누구에게나 파는 방식입니다. 반면 메모리 파운드리는 고객사가 설계한 AI 칩 구조에 맞춰 D램을 맞춤 제작하는 방식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에 가깝습니다. 진입 장벽이 높은 대신, 고객 이탈도 어렵고 이익률도 더 높을 수 있습니다.
Q. LPDDR이 데이터 센터에서 쓰이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A. LPDDR은 원래 스마트폰처럼 배터리로 작동하는 기기를 위해 만들어진 저전력 D램입니다. AI 데이터 센터가 전력 소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저전력 설계 방식이 유용하다는 점을 AI 반도체 설계사들이 주목하면서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용도와 전혀 다른 시장이 새로 열린 셈입니다.
Q.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빠르게 키울 수 있었던 배경이 뭔가요?
A. 이차전지와 마찬가지로, 중국 내부의 막대한 수요가 학습 곡선 진입을 앞당겼습니다. 중국 내 메모리 수요 자체가 자국 생산량으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서, CXMT는 수출 없이도 규모를 키울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의 제재가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적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
저의 마음에 오래 남은 장면은 중국 체육관에서 로봇을 학습시키는 젊은 인턴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직접 데이터를 만들고 있는 그 모습이, 반도체 시장에서 저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을 파고드는 방식과 정확히 같은 논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양으로 진입해서 학습 곡선을 타고, 결국 질적 격차를 좁혀오는 패턴. 이차전지에서 이미 한 번 당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렇다고 비관만 할 이유는 없습니다. D램의 맞춤화, 메모리 파운드리로의 전환, 그리고 사내 스핀오프를 통한 기민한 조직 운영이 지금 한국 반도체가 쥘 수 있는 카드입니다. 시간을 벌어주는 전략은 영구적인 해법이 아니지만, 그 시간 안에 다음 격차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