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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가 이겨도 벌고, 빅테크가 엔비디아를 밀어내도 버는 회사가 있습니다. 브로드컴입니다. 저는 AI 반도체 관련 종목을 공부하면서 이 회사를 처음 제대로 들여다봤는데, 솔직히 이것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총을 파는 상인이 왕보다 더 안전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숫자로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브로드컴의 혹 탄
브로드컴이 AI 반도체 시장에서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사실 10년 전 한 사람의 판단에서 시작됐습니다. 혹 탄(Hock Tan) CEO입니다.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장학금 하나 들고 미국에 건너온 그가 지금은 시가총액 수천 조 원짜리 회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혹 탄의 경영 방식은 독특합니다. 직접 기술을 발명하는 것보다 잘 만들어진 회사를 인수한 뒤 군살을 걷어내고 현금을 뽑아내는 방식이죠. 2023년에는 VM웨어를 610억 달러에 삼켰습니다. 인수 후에는 연구개발이든 마케팅이든 수익에 기여하지 않는 부분은 가차 없이 잘라냅니다. 냉혹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결과는 매번 확실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5년이었습니다. 당시 브로드컴은 와이파이, 블루투스 같은 통신 칩을 만들던 평범한 회사였습니다. 그때 구글이 찾아와 자사 전용 AI 칩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이게 지금 구글 TPU(Tensor Processing Unit)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TPU란 AI 연산에 특화된 맞춤형 프로세서로, 범용 GPU 대비 특정 모델 처리에서 전력 효율이 훨씬 높은 반도체를 말합니다.
혹 탄은 이 의뢰를 단순한 부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빅테크 모두가 자기만의 AI 칩을 원하게 될 것이고, 그걸 혼자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없다는 걸 꿰뚫었습니다. 그 판단 하나로 통신 칩 회사에서 빅테크 전용 AI 칩 설계사로 회사를 통째로 틀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것이 반도체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과감한 방향 전환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맞춤형 칩이라는 함정
브로드컴이 파는 것은 ASIC(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입니다. 여기서 ASIC이란 특정 용도 하나만을 위해 설계된 반도체로, 쉽게 말해 맞춤 정장 같은 칩입니다. 구글에는 구글 모델만을 위한 칩, 메타에는 메타 모델만을 위한 칩을 따로 설계합니다.
엔비디아 GPU는 누가 사도 쓸 수 있는 기성복입니다. 성능은 최고지만 가격도 최고고, 내 모델에 필요 없는 기능 값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반면 브로드컴의 맞춤 칩은 딱 하나의 모델만 잘 돌리면 되니까, 전력 소비도 낮고 단가도 훨씬 쌉니다. 엔비디아가 AI를 처음부터 학습시키는 훈련(Training) 단계에 강하다면, 브로드컴 칩은 이미 학습된 AI를 실제 서비스에 올리는 추론(Inference) 단계에 특화돼 있습니다.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역할 분담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번 브로드컴을 선택한 고객은 떠나기 어려울까요? 맞춤 정장을 지으려면 재봉사가 몸을 구석구석 재야 합니다. 브로드컴은 고객사의 AI 아키텍처 깊숙이 들어가 몇 년에 걸쳐 함께 칩을 만듭니다. 이렇게 한 번 관계가 맺어지면, 다른 업체로 갈아타려면 처음부터 수년의 공동 설계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상 이동이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종류의 '전환 비용'이 높은 기업이야말로 장기 투자에서 가장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브로드컴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AI 데이터 센터 하나에는 칩이 수십만 개 들어가고, 이 칩들이 서로 통신하려면 초고속 네트워크 경로가 필요합니다. 그 경로를 구성하는 이더넷 스위치(Ethernet Switch)를 브로드컴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더넷 스위치란 데이터 센터 안에서 수많은 칩과 서버가 데이터를 주고받는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하는 장비입니다. 엔비디아 칩을 쓰든 브로드컴 칩을 쓰든, 그 칩들을 잇는 길목에는 어차피 브로드컴이 있습니다. 총만 파는 게 아니라 도로까지 가진 무기상인 셈입니다. 출처: Broadcom 공식 제품 페이지
브로드컴 AI 사업의 핵심 구조
- ASIC 맞춤 설계: 구글 TPU, 메타 MTIA 등 빅테크 전용 칩 공동 개발
- 추론(Inference) 특화: 학습이 끝난 AI 모델을 저비용·저전력으로 운용
- 이더넷 스위치 장악: 어떤 칩을 쓰든 데이터 센터 내 통신 경로는 브로드컴을 통과
- 선수주 잔고: 이미 730억 달러어치 주문을 미리 확보(아직 만들지 않은 칩 포함)
투자 리스크
2026년 6월, 브로드컴은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AI 반도체 부문에서만 108억 달러를 기록했고,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43% 성장한 수치입니다(출처: Broadcom 투자자 관계 페이지). 그런데 발표 직후 주가는 오히려 빠졌습니다. 저도 이 부분이 처음엔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콘퍼런스 콜 내용을 찾아봤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VM웨어 소프트웨어 부문 매출이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다만 이건 단순한 부진이 아닙니다. 혹 탄이 VM웨어 인수 후 판매 방식을 영구 라이선스에서 구독(Subscription)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도기가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구독으로 바꾸면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반복 매출이 생기지만, 전환 기간에는 일시적으로 숫자가 꺾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적 전환을 단기 실적 부진과 혼동하면 좋은 매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하나는 혹 탄의 침묵이었습니다. 시장은 실적이 워낙 좋으니 2027년 AI 칩 매출 목표 1,000억 달러를 더 올려 부를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혹 탄은 목표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브로드컴의 AI 매출을 만들어 내는 고객은 구글, 메타, 오픈AI, 앤트로픽 등 단 여섯 곳 안팎입니다. 수십조 원을 들여 자체 칩 개발에 나설 수 있는 회사가 전 세계에 그 정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고객 집중도가 브로드컴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여섯 중 하나만 마음을 바꿔도 목표가 흔들립니다.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구조인 거죠.
추격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현재 맞춤형 AI 칩 설계 시장은 브로드컴과 마벨(Marvell)이 95%를 과점하고 있습니다. 마벨이 바짝 뒤를 쫓으면서 브로드컴 단독으로 가격을 좌우하는 힘이 조금씩 줄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 분기 AI 매출이 브로드컴이 예고한 160억 달러 수준으로 실제로 나오는지, 그 숫자가 지금 가장 중요한 체크포인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브로드컴은 엔비디아랑 경쟁하는 건가요?
A.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엔비디아는 AI 학습(Training) 단계에서 압도적이고, 브로드컴의 맞춤 칩은 학습이 끝난 모델을 저렴하게 서비스에 올리는 추론(Inference) 단계에 특화돼 있습니다. 역할이 다른 만큼 둘은 사실상 분업 관계입니다.
Q. 브로드컴 주식, 지금 사도 괜찮을까요?
A. 저는 투자 전문가가 아니라 개인적인 판단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다만 구조적으로 보면 730억 달러 선수주 잔고와 이더넷 스위치 과점이라는 안전망이 있습니다. 고객이 여섯 곳 안팎에 집중돼 있다는 리스크를 충분히 감안한 후 판단하시길 권합니다.
Q. 오픈AI랑 앤트로픽이 서로 경쟁사인데 왜 같은 브로드컴을 쓰나요?
A. 맞춤형 AI 칩을 설계해 줄 수 있는 회사가 사실상 브로드컴과 마벨 둘뿐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수십조 원을 투자해 자체 칩을 원하는 회사도 소수이고, 그걸 받아줄 수 있는 파트너도 소수입니다. 원수끼리 같은 무기상을 쓰는 건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에 가깝습니다.
Q. 혹 탄이 VM웨어를 산 게 브로드컴에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A.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영구 라이선스에서 구독 방식으로 전환하면 매달 안정적인 반복 매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전환 기간에는 매출이 일시적으로 꺾이는 진통이 있어, 단기 실적만 보면 아직 부담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결론
브로드컴을 엔비디아의 대체재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틀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엔비디아가 전면에서 싸우는 왕이라면, 브로드컴은 그 전쟁터에 양쪽 모두에게 총을 팔고 탄환이 오가는 길목에서 통행료까지 받는 상인입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상인은 돈을 법니다.
물론 고객이 여섯 곳에 집중돼 있다는 리스크, 마벨의 추격, VM웨어 전환 과도기는 반드시 눈에 넣고 봐야 합니다. 다음 분기 AI 매출 160억 달러가 실제로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브로드컴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입니다.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브로드컴이 이미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만큼은 숫자가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