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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아부다비를 그냥 오일머니 많은 곳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2016년부터 규제 샌드박스를 깔고, 2018년에 이미 가상자산 프레임워크를 세계 최초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석유로 번 돈을 비트코인 채굴에 넣고, 법 체계까지 뜯어고쳐서 글로벌 금융을 빨아들이고 있는 아부다비의 설계가 생각보다 훨씬 치밀했습니다.

영미법 섬,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일곱 개 토후국의 연합체입니다. 그중 대부분은 유럽의 대륙법 체계를 따르는데, 유독 아부다비만 영미법(Common Law)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왜 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대륙법과 영미법의 핵심 차이는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대륙법은 "하라는 것만 해라"이고, 영미법은 "하지 말라는 것만 피해라"입니다. 여기서 영미법이란 영국에서 발전해 미국으로 이어진 법 체계로, 금지 목록만 없으면 나머지는 모두 허용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핀테크나 블록체인 기업 입장에서는 영미법 환경이 사업을 설계하기 훨씬 유리합니다.
그리고 영미법의 결정적 산물이 바로 신탁(Trust) 제도입니다. 신탁이란 자산의 실제 소유자(신탁자)와 그 자산을 관리하는 사람(수탁자)을 법적으로 분리해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이게 중세 십자군 전쟁 때 영주들의 토지 분쟁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원정 떠난 영주가 돌아왔더니 맡겼던 토지를 수탁자가 차지해 버리는 일이 반복되자, 왕이 법관에게 형평법(Equity) 재량을 주면서 신탁자와 수탁자를 구분하는 관습이 생긴 것입니다.
이 신탁 제도가 현대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는 파산격리제도로 이어집니다. 파산격리제도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파산하더라도 이용자가 맡긴 예치금을 발행사 자산과 완전히 분리해 다른 채권자가 압류하지 못하게 보호하는 장치입니다. 아부다비가 영미법을 택한 이유가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이 깊은 법적 인프라까지 끌어오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제가 이 흐름을 따라가며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 대륙법: 성문화된 조항에서 허용된 것만 가능 → 핀테크 사업 범위 제한
- 영미법: 금지 항목 외 모두 허용 → 신사업 설계 자유도 극대화
- 신탁(Trust) 제도 → 현대 파산격리제도의 원형, 디지털 자산 보호에 직결
ADGM이 만든 판
아부다비 글로벌 마켓, 즉 ADGM은 아부다비가 영미법 기반으로 조성한 국제 금융 특구입니다. 제가 UAE 바이낸스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넓은 사무실에 직원이 다섯 명도 안 됐습니다. 그때는 "이게 뭐지?"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초기 규제 관할권을 선점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ADGM은 2016년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Lab)를 도입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규제 샌드박스란 신규 핀테크 기업에게 2년간 자본금 규제 등을 유예해주고, 그 기간 동안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후 규제를 적용하는 제도입니다. 이걸 보고 이스라엘, 유럽 등지의 핀테크들이 빠르게 몰려들었습니다.
2018년에는 가상자산 프레임워크를 세계 최초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유럽에도 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아부다비는 디지털 자산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결제 자산, 달러 등 실물 자산을 참조하는 자산참조 토큰(스테이블코인), 그리고 STO·RWA 기반의 디지털 증권입니다. 알고리즘 기반 토큰은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이 분류 체계가 기관들이 법적으로 안전하게 가상자산을 회계 처리할 수 있는 근거가 됐습니다(출처: ADGM 공식 사이트).
그 결과 2022년 바이낸스가 사실상의 본거지를 아부다비에 뒀습니다. 바이낸스는 거래 체결, 청산·수탁, OTC 거래 이렇게 세 개 법인으로 분리해 ADGM 규제 관할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2023년 노무라 증권 진출, 2024년 써클의 적격 스테이블코인 인증, 레이 달리오의 패밀리 오피스 이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 ADGM에는 170여 개 자산운용사, 220여 개 펀드가 활동 중입니다. 제 경험상 이 정도 규모가 단기간에 하나의 경제특구에 집결하는 건 정말 이례적입니다.
페트로달러 2.0과 비트코인
아부다비를 보면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미국과 중국 사이를 능숙하게 저글링한다는 점입니다. 한쪽에는 엠브릿지(mBridge)를 통해 중국의 탈달러 전략을 일부 지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의 페트로달러 2.0 체제에서 전략 파트너 역할을 맡습니다.
엠브릿지란 브릭스 국가들이 각국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연결해 달러 없이 무역 결제를 할 수 있게 만든 블록체인 결제망입니다. 아랍에미리트 연합은 여기에 일찌감치 가담해 중국이 원유를 위안화 CBDC로 결제하는 거래를 실제로 성사시켰습니다. 상징적 의미는 크지만, 실제 거래 규모는 아직 90조 원 수준으로 달러 결제망을 대체할 수준은 아닙니다(출처: BIS mBridge 프로젝트).
반대편에서는 IFAD(아부다비 머반 석유 선물거래소)에서 원유 선물 거래를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하는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IFAD란 ICE(뉴욕증권거래소 운영사)가 2021년 아부다비에 세운 석유 선물거래소로, 미국이 페트로달러 2.0 전략에서 핵심 거점으로 설정한 곳입니다. 미국은 서클 등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이 결제망에 안착하길 원하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달러 스왑을 조건으로 당근을 내밀고 있습니다.
비트코인 보유 방식도 제가 예상한 것과 달랐습니다. 아부다비 국부펀드 ADQ는 미국 채굴 기업 마라톤 디지털과 합작법인을 만들어 UAE의 저렴한 전기로 비트코인을 직접 채굴합니다. 비공식 추산으로 약 1만 BTC를 확보했고, 또 다른 국부펀드 무바달라는 블랙록의 비트코인 현물 ETF인 IBIT 지분을 통해 약 5,000 BTC에 해당하는 간접 보유도 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공식 선언 없이 왕가의 펀드 구조를 통해 조용히 포지션을 쌓는 방식입니다.
AI 분야도 같은 논리입니다. 아부다비 AI 차르 셰이크 타흐눈이 이끄는 국영 AI 기업 G42는 화웨이 통신망을 미국 칩으로 교체하는 대가로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15억 달러 투자를 받았고, 미국 상무부는 엔비디아 블랙웰 고성능 GPU의 수출을 승인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딜은 단순한 기업 투자가 아니라 지정학적 포지션 교환입니다.
- 엠브릿지 참여: 중국의 위안화 CBDC 결제 일부 허용 → 탈달러 협력 신호
- IFAD 스테이블코인 결제 테스트: 미국 페트로달러 2.0 체제 편입 행보
- ADQ × 마라톤 디지털 합작: 비트코인 1만 BTC 채굴 보유(비공식 추산)
- 무바달라 IBIT 보유: 현물 ETF 통한 간접 비트코인 약 5,000 BTC 확보
- G42 화웨이→미국 칩 교체: AI 분야에서 미국으로 무게중심 이동
자주 묻는 질문
Q. 아부다비가 비트코인을 공식 비축 자산으로 선언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A. 중동에서는 왕이 곧 국가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왕가의 국부펀드가 보유하면 사실상 국가 보유와 같은 효과가 납니다. 공식 선언보다 조용히 포지션을 쌓는 방식이 외교적으로도 훨씬 유연합니다. 미국·중국 양쪽 눈치를 봐야 하는 아부다비 입장에서 공개 선언은 오히려 패를 먼저 보여주는 셈이 됩니다.
Q. ADGM이 두바이 DIFC와 다른 점은 뭔가요?
A. 두 곳 모두 영미법 기반 금융 특구입니다. 다만 ADGM은 아부다비 왕가의 국부펀드와 직접 연결된 산업 육성 전략 안에 있어, 바이낸스 규제 관할권 유치나 비트코인 채굴 합작 같은 디지털 자산 중심 딜이 더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DIFC는 전통 금융 허브로서 역사가 더 깁니다.
Q. 위안화로 원유 결제가 확대되면 달러 패권이 흔들리나요?
A. 현재로선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다. 산유국 입장에서 위안화를 받으면 그 돈으로 투자할 수 있는 2차 자산시장이 필요한데, 중국 자본시장의 규모와 투명성이 아직 달러 자산시장을 대체하기엔 부족합니다. 엠브릿지 거래 규모가 아직 90조 원 수준에 머무는 것도 이 한계를 반영합니다. 상징적 의미는 있지만 구조적 전환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Q. 파산격리제도가 스테이블코인 투자자 보호에 실제로 효과가 있나요?
A. 이론적으로는 발행사가 파산해도 이용자 예치금이 별도 신탁 계정에 분리돼 있어 다른 채권자가 건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보호 장치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수탁 기관이 분리 원칙을 얼마나 엄격히 지키는지가 관건입니다. ADGM은 4대 회계법인에게 가상자산을 금융자산으로 대차대조표에 올릴 수 있게 허용해 이 투명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결론
제가 느낀 건, 아부다비는 단순히 가상자산 친화 국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영미법 도입, ADGM 샌드박스, 가상자산 분류 체계, 비트코인 채굴 합작, 스테이블코인 결제 테스트까지 이 모든 것이 페트로달러 2.0 시대에 석유 패권을 금융 패권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설계도 안에 있습니다.
아부다비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발 빠르게 미국과 가상자산·AI 분야에서 유착 관계를 만들면서 수니파 맹주 경쟁에서도 포지션을 높이고 있습니다. 중국과의 밀당은 계속되겠지만, AI 칩 공급망 교체 이후 무게중심은 미국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상태로 보입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을 읽을 때 아부다비를 석유 나라로만 보면 절반밖에 못 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