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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을 때 이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월급을 받자마자 전액을 코인으로 바꾼다는 얘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건 투기가 아니라 생존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페소화를 그냥 들고 있으면 자산이 녹아내리는 구조라,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보통예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메시의 나라, 탱고의 나라로만 알고 있었던 제 인식이 완전히 바뀐 계기였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게 된 사정
일반적으로 코인을 쓴다고 하면 투자나 투기 목적을 먼저 떠올리는데, 아르헨티나는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제가 이 나라의 페소 환율 추이를 찾아봤을 때 숫자가 너무 커서 처음엔 단위 착오인 줄 알았습니다. 2018년에 달러당 20페소이던 환율이 2026년 현재 1,400페소를 넘어섰습니다. 6년 사이에 70배 이상 폭락한 겁니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란 달러 같은 기축통화 가치에 1:1로 고정된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USDT(테더)나 USDC가 대표적인데, 1코인이 항상 1달러에 가깝게 유지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직장인들이 월급을 받자마자 USDT로 바꾸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페소로 들고 있으면 다음 달 월급날까지 실질 가치가 줄어드는 반면, 달러 가치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그 하락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달러를 직접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르헨티나는 외환 통제 국가입니다. 개인이 연간 살 수 있는 달러 한도가 2,000달러에 불과하고, 수출입 사업자가 페소를 달러로 환전할 때는 금액의 17%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합니다. 사실상 달러 보유를 막아놓은 구조인데, 그 공백을 스테이블코인이 채운 겁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아르헨티나 전체 소액 결제의 31%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루어졌다는 통계가 이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출처: Chainalysis 글로벌 암호화폐 채택 지수).
- 2018년 달러당 20페소 → 2026년 현재 1,400페소 이상 (70배 이상 폭락)
- 연간 달러 구매 한도 2,000달러로 제한 — 사실상 외환 통제
- 2017~2022년 소액 결제의 31%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
- 비자카드 연계 스테이블코인 카드 출시, 가게마다 USDT 결제 QR코드 비치
아르헨티나가 디지털자산에 일찍 눈뜬 이유
경제가 어려운 나라가 디지털 자산 활용이 높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 아르헨티나의 인프라 수준이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나라치고는 인터넷 보급률이 97%, 스마트폰 보급률이 91%로, 중남미 국가 중 압도적 1위 수준입니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부터 인터넷 보급에 사활을 걸었다고 합니다. 속도를 높이는 것보다 일단 전 국민에게 연결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뒀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인터넷 속도는 한국의 4분의 1 수준에 그치지만, 연결 자체가 안 되는 가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과 아시아의 통신 회사들이 지금도 아르헨티나를 탐나는 업그레이드 미개척 시장으로 보고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전자상거래(e-commerce) 경험이 더해졌습니다. 여기서 전자상거래란 온라인을 통한 물건 구매·판매 전반을 뜻하는데,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최대 인터넷 쇼핑몰을 자국에서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디지털 결제 경험이 풍부합니다. 스마트폰으로 결제하는 데 낯설지 않은 국민들이 USDT로 결제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겁니다. 제 생각에 새로운 결제 방식이 퍼지려면 기반 환경이 먼저 깔려야 하는데, 아르헨티나는 그 조건을 경제 위기 속에서도 조용히 갖춰온 셈입니다.
리브라 스캔들
밀레이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글로벌 코인 커뮤니티의 반응은 거의 축제에 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레이는 선거 운동 내내 "중앙은행과 페소는 국민을 속이는 사기"라고 주장했고, 비트코인을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화폐 회복 운동"이라고 공개 지지했습니다. 2023년 연말 당선 소식이 전해지자 비트코인 가격이 하루 만에 2% 폭등했고,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5천만 원을 돌파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 흐름을 보면서 기대감이 생겼었습니다.
그런데 취임 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밀레이 대통령이 자신의 개인 SNS에 "아르헨티나 경제 개혁 프로젝트" "중소기업을 위한 미래" 같은 문구와 함께 특정 코인 주소 링크를 올린 겁니다. 명시적으로 코인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링크를 클릭하면 '리브라(LIBRA)'라는 밈코인으로 연결됐습니다. 여기서 밈코인(Meme Coin)이란 실질적인 기술이나 사업 모델 없이 화제성·유행에 기대 만들어진 코인을 말합니다. 투기 수요가 몰리기 쉽고 가격 조작에 취약합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링크가 올라오자 리브라 코인 시가총액이 순식간에 6조 2,000억 원 규모로 폭등했다가, 불과 5시간 만에 1,500억 원으로 폭락했습니다. 러그풀(Rug Pull), 즉 개발자들이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뒤 보유 물량을 한꺼번에 던져버리는 전형적인 사기 수법입니다. 7만 명이 평균 4,000달러 이상의 손실을 봤습니다. 뉴욕타임즈 보도에 따르면, 리브라 코인 상장 당일 밤 밀레이 대통령이 상장 관계자들과 일곱 차례 통화한 기록이 확인됐습니다(출처: The New York Times). 이후 밀레이는 "게시물을 올린 건 대통령 계정이 아닌 개인 SNS이고, 프로필에도 '경제학자'라고만 써 있다"고 해명했는데, 제가 보기에 이건 궁색한 변명에 가까웠습니다.
밀레이의 경제 실험
밀레이 정권의 상징은 전기톱입니다. 선거 유세장에서 실제 전기톱을 들고 "모든 낭비를 잘라내겠다"고 외쳤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집권 후 실제로도 그렇게 했습니다. 공무원 감축, 대학 지원금 동결, 연금 동결, 저소득층 생활 지원금 삭감까지 정부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숫자는 바뀌었습니다. 2023년 연말 211%에 달했던 연간 인플레이션이 2025년 기준 31%대로 낮아졌습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란 물가상승률이 통상 연 50% 이상을 초과하는 극단적 인플레이션 상태를 뜻하는데, 211%는 그 기준도 훌쩍 넘는 수치였습니다. 31%도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그 전과 비교하면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기적처럼 느껴질 수 있는 변화입니다. 주식 시장도 취임 후 100% 이상 급등하며 외국 투자자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수치의 이면이 더 중요합니다. 인플레이션을 잡은 핵심 방법이 화폐 발행량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그 직격탄을 맞은 건 연금 생활자, 저소득층,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에서 지원금을 동결하는 건 사실상 삭감과 같습니다. 매일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은퇴자들과 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아르헨티나 뉴스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경제 지표는 살아났는데, 정작 그 혜택이 닿지 않는 곳이 너무 넓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코인베이스가 2025년 1월 아르헨티나 시장에 진출했다가 리브라 스캔들 직후 "재정비"를 이유로 철수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아무리 스테이블코인 사용자가 많아도, 최고 권력자의 신뢰가 무너진 시장에 계속 있기가 부담스러웠던 겁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아르헨티나에서 USDT로 실제 물건을 살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코인은 거래소에서만 쓴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아르헨티나는 편의점부터 식당까지 USDT 결제 QR코드가 계산대마다 붙어 있을 정도입니다. 비자카드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카드도 발급 가능해, 충전해두면 일반 신용카드처럼 쓸 수 있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여행자 기준으로도 스테이블코인만으로 불편함 없이 여행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Q. 아르헨티나 페소가 왜 이렇게 가치가 떨어진 건가요?
A.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과도한 화폐 발행이 핵심 원인입니다. 정부가 부족한 재원을 메우기 위해 돈을 계속 찍어내면 시중에 화폐가 넘쳐나고, 자연스럽게 화폐 가치는 하락합니다. 여기에 정치적 불안정과 외채 문제가 반복되면서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남미 국가들이 경제가 불안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르헨티나는 그 중에서도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여러 차례 겪은 나라입니다.
Q. 리브라 스캔들이 아르헨티나 코인 시장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가요?
A. 단기적으로는 상당히 컸습니다. 코인베이스가 진출 직후 철수한 것이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다만 스테이블코인 사용 자체는 생존 수단이기 때문에 줄어들 가능성은 낮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밀레이 개인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USDT를 쓰는 이유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스테이블코인 사용 기조는 오히려 확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밀레이 대통령이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할 가능성이 있나요?
A. 현 시점에서는 가능성이 낮습니다. 밀레이는 선거 기간에 비트코인을 지지했지만, 엘살바도르처럼 법정화폐로 채택하겠다고 공식 약속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리브라 스캔들 이후 디지털 자산에 관한 발언 자체를 자제하고 있고, 재선도 불확실한 상황이라 이 의제를 다시 꺼내들기는 정치적으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결론
아르헨티나를 살펴보면서 크게 바뀐 저의 생각은 이겁니다. 스테이블코인은 투자 수단이 아닌 방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칠레 편의점 강도가 페소 지폐 다발을 집어 들었다가 그냥 던져버렸다는 CCTV 영상이 유명한데, 저는 그게 지금 아르헨티나 현실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도조차 원하지 않는 화폐를 쓰는 나라의 국민들이 디지털 자산으로 이동하는 건 사실 너무 당연한 결과입니다.
밀레이의 경제 실험이 진짜 기적으로 완결될지, 아니면 약자를 희생시킨 수치 조작으로 평가받을지는 아직 열린 질문입니다. 다만 아르헨티나에서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은 정권의 향방과 무관하게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달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달러와 동등한 가치를 제공하는 도구가 이미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이 아르헨티나를 넘어 어디까지 퍼질지, 저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