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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망했다고요? 저는 한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잃어버린 30년, 엔화 약세, 고령화까지. 그런데 막상 자민당이 설계한 온체인 전략의 구조를 들여다보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루 레포 거래 규모만 1조 6천억 달러, 우리 돈으로 2,000조 원이 넘습니다. 일본은 지금 그 돈 위에 블록체인 인프라를 깔고 있는 중입니다.

1층: 도매 CBDC가 깔리는 자리
솔직히 처음에는 "CBDC가 뭐가 대단하다고" 싶었습니다. 그냥 디지털 돈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레포(Repo) 시장이라는 걸 알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레포 거래란 은행과 은행 사이에서 국채를 담보로 하루 단위로 돈을 빌리고 갚는 초단기 금융 거래를 말합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주식 시장이나 외환 시장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훨씬 조용하게 돌아가는 금융 시스템의 가장 밑바닥 층입니다.
일본의 레포 거래 규모는 하루에 1조 6천억 달러입니다. 전 세계 레포 거래 합산이 약 20조 달러이고, 미국 혼자만 12조 달러이니 일본은 미국 대비 약 15%, 글로벌 기준으로는 약 10%를 차지합니다(출처: 일본은행(Bank of Japan)). 숫자로만 보면 좀 밋밋한데, 저는 이 2,000조 원이라는 규모를 보면서 진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거래에 붙는 수수료와 비용만 해도 엄청난 규모니까요.
일본이 노리는 건 바로 이 레포 시장에 도매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깔겠다는 겁니다. 도매 CBDC란 개인이 쓰는 게 아니라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사이의 결제에 쓰이는 디지털 화폐입니다. 지금은 이 레포 거래가 결제 완료까지 이틀(T+2)이 걸립니다. 결제 요청 시점부터 실제 청산이 완료되기까지의 이 시간 지연이 거래 비용을 만들고, 그 사이에 체결하지 못하는 계약들도 생깁니다. CBDC를 깔면 이게 버튼 하나로 실시간 처리됩니다. 국채가 들어오고 돈이 나가는 게 동시에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화폐 유통 속도(Velocity)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화폐 유통 속도란 같은 돈이 경제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손을 바꾸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유통 속도가 3배 빨라지면 화폐량이 3배 늘어난 것과 같은 효과가 납니다. 실제로 돈을 더 찍지 않아도, 엔화의 경제적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는 셈입니다. 일본은 이 방식으로 엔화의 실질 화폐량을 키우겠다는 구상을 세운 겁니다.
- 일본 일일 레포 거래 규모: 약 1조 6천억 달러(한화 약 2,000조 원 이상)
- 현재 결제 소요 시간: T+2(이틀) → 도매 CBDC 도입 시 실시간 처리로 단축
- 화폐 유통 속도(Velocity) 3배 상승 시 실질 화폐량 3배 증가 효과
- 전 세계 레포 거래에서 일본 비중: 글로벌 약 10%, 미국 대비 약 15%
2층: 예금 토큰과 디카렛
CBDC가 1층이라면 2층은 기업 간 거래 영역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예금 토큰이 스테이블코인이랑 뭐가 다른 거지?" 싶었습니다.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똑같이 디지털 화폐니까요. 그런데 구조를 파고들수록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습니다.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란 달러 등 법정화폐에 가치를 고정한 디지털 화폐로, 서클(Circle) 같은 민간 발행사가 돈을 받고 같은 금액의 토큰을 발행하는 구조입니다. 발행사가 그 돈으로 미국 단기 국채를 사서 준비금으로 쌓아두는 방식이죠. 이 구조에서는 사용자와 은행 계좌 사이에 발행사가 끼어 있고, 사용자는 이자를 받기는커녕 수수료를 냅니다(출처: BIS(국제결제은행) 워킹페이퍼).
반면 예금 토큰(Deposit Token)은 미쓰비시 UFJ 은행처럼 시중은행이 기업 예금 계좌의 잔액을 그대로 토큰으로 발행해 주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발행사가 따로 없다는 겁니다. 기업이 미쓰비시 은행에 1,000억 엔을 예치하고 있으면, 그 1,000억 엔을 그대로 토큰 형태로 꺼내 쓰는 겁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 차이가 실제 사용 의사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금융 시스템을 공부하면서 처음 실감했습니다. 이자를 주느냐 안 주느냐는 기업 입장에서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예금 토큰을 실제로 구현한 게 바로 디카렛 디스피(Dcash DSPF, Digital Currency Platform) 컨소시엄입니다. 일본 3대 메가뱅크와 약 72개 기업이 참여해 만든 이 컨소시엄은 JP모건의 JPM 코인을 벤치마킹한 폐쇄형 블록체인 플랫폼입니다. JPM 코인이란 JP모건이 기관 고객들 사이의 결제를 위해 발행한 은행 자체 디지털 화폐로, 외부 공개 블록체인이 아닌 자체 폐쇄망 안에서만 작동합니다.
디카렛 컨소시엄의 1차 활용 목적은 전력 요금 결제와 탄소 배출권 거래입니다. 72개 기업 안에 일본 전력 회사들이 포함돼 있어서, 기업들이 전기 요금을 디카렛 토큰으로 즉시 결제하는 구조를 먼저 만들겠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 선택은 꽤 영리합니다. 전력 거래는 거래 빈도가 높고 결제 금액도 커서, 실시간 결제의 효과가 가장 빠르게 드러나는 영역이거든요. 탄소 배출권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시장도 처음부터 온체인으로 설계하면 거래 비용 절감 효과가 큽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기업 전용이라는 점입니다. 일반 소비자는 이 2층에 없습니다.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진영의 침투를 막으면서도 기업 고객들에게 이자까지 주는 예금 토큰으로 자기 진지를 지키겠다는 전략이 여기서 보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 구조는 상당히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도매 CBDC와 일반 CBDC는 뭐가 다른 건가요?
A. 일반 CBDC(리테일 CBDC)는 개인이 직접 쓰는 디지털 화폐를 말하고, 도매 CBDC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사이의 대규모 금융 거래에 쓰이는 화폐입니다. 일본이 1층에 깔겠다는 건 이 도매 CBDC로, 하루 수천조 원 규모의 은행 간 레포 거래를 실시간 처리하는 게 목적입니다. 일반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금융 시스템 전체의 속도와 비용 구조를 바꾸는 기반이 됩니다.
Q. 예금 토큰은 스테이블코인보다 무조건 좋은 건가요?
A. 기업 입장에서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 장점입니다.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사에 수수료를 내고 쓰는 구조인 반면, 예금 토큰은 기존 예금에 이자가 붙은 상태로 토큰처럼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예금 토큰은 폐쇄형 컨소시엄 내에서만 사용되기 때문에 범용성 면에서는 스테이블코인보다 제한적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기업에 유리한지는 거래 상대방과 참여 기업군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Q. 디카렛 디스피 컨소시엄에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나요?
A. 현재 구조상 일반 소비자는 참여 대상이 아닙니다. 디카렛 컨소시엄은 일본 3대 메가뱅크와 72개 기업이 구성한 B2B 전용 플랫폼입니다. 전력 회사 간 요금 결제, 탄소 배출권 거래 등 기업 간 거래를 온체인화하는 게 1차 목표입니다. 일반인이 접하게 되는 건 훨씬 이후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Q. 화폐 유통 속도(Velocity)가 빨라지면 실제로 어떤 효과가 생기나요?
A. 화폐 유통 속도란 동일한 화폐가 경제 안에서 얼마나 자주 거래에 사용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지금은 결제에 이틀이 걸리기 때문에 그 이틀 동안 돈이 묶여 있습니다. 실시간 결제로 바뀌면 같은 돈으로 하루에 훨씬 많은 거래를 처리할 수 있어서, 실질적으로 화폐량이 늘어난 것과 같은 경제 효과가 발생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돈을 더 찍지 않고도 엔화의 경제적 활용도를 높이는 방법입니다.
결론
저는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일본이 블록체인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있다는 게 피부에 잘 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도매 CBDC로 레포 시장을 온체인 화하는 1층, 예금 토큰과 디카렛으로 기업 간 결제를 실시간 화하는 2층이라는 2단 구조를 보고 나서는 이게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실제 설계도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게 계획대로 다 굴러갈지는 지켜봐야 합니다. 72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만들었다고 해서 실제 사용이 자리 잡기까지는 넘어야 할 규제와 기술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규모 자체가 이미 작동 중인 레포 시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JPM 코인이라는 실제 작동 중인 모델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은 현실성을 높이는 요소로 보입니다. 일본의 온체인 전략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앞으로 계속 지켜볼 가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