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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피처와 달러 패권 (신탁제도, 유로달러, 스테이블코인)

themorethebetter 2026. 8. 2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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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버뮤다나 케이맨 제도가 그냥 "부자들이 세금 피하는 섬나라" 정도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조세피처들의 역사를 파고들다 보니, 이게 단순한 절세 이야기가 아니라 달러 패권과 영국의 금융 전략, 그리고 테더·서클 같은 스테이블코인 업체들의 본사 위치까지 한 줄로 연결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12세기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해 2026년 가상자산 시장까지 이어지는 이 흐름에 놀랐습니다.

     

    조세피처와 달러 패권 (신탁제도, 유로달러, 스테이블코인)
    조세피처와 달러 패권 (신탁제도, 유로달러, 스테이블코인)

     

    신탁제도의 기원과 조세피처의 구조

    버뮤다,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BVI), 케이맨 제도, 세인트키츠. 이 지명들을 나열해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전부 영국령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 인식했을 때,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역들이 조세피처로 기능할 수 있는 핵심 이유는 영미법상의 신탁(Trust) 개념에 있습니다. 여기서 신탁이란, 실제 자산 소유자와 장부상 소유자를 법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가진 재산을 남의 이름으로 등록해 두되, 실제 혜택은 내가 받는 구조가 법적으로 인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개념의 뿌리는 12세기 십자군 원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영국 영주들은 장거리 원정을 떠나면서 자신의 영지를 친구에게 맡겼습니다. 친구가 운영 수익을 영주의 가족에게 전달하는 수탁(Trust) 구조를 만든 것인데, 이 과정에서 수탁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문법과는 별개로 형평법(Equity Law)이라는 법 전통을 발전시켰고, 실제 소유권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굳어졌습니다. 여기서 형평법이란, 성문화된 법 조항이 아닌 공정성과 관행에 근거해 판결하는 영국 고유의 법 체계를 의미합니다.

    왕이 마음만 바꾸면 영주의 토지를 몰수할 수 있던 시대에, 영주들은 소유권을 장부상으로 여러 명에게 분산시켜 몰수 리스크를 줄이는 방편으로 이 제도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이게 지금의 조세피처에서 차명 법인 설립이 가능한 법적 근거로 이어진 것입니다. 제가 이 연결고리를 처음 이해했을 때, 역사가 이런 식으로 제도를 만드는구나 싶어서 꽤 오래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기에 더해 조세피처들은 OECD의 공동보고기준(CRS)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도 핵심입니다. CRS란 각국이 금융계좌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국제 협정으로, 특정 국가의 사법당국이 자산 소유권 정보를 요청할 때 협력하는 체계를 말합니다. 케이맨 제도 같은 영국령 조세피처들은 이 협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어떤 나라가 소유자 정보를 요청해도 공개 의무가 없습니다.

    • 신탁(Trust): 실제 소유자와 장부상 소유자를 법적으로 분리하는 영미법 개념
    • 형평법(Equity Law): 성문법 외에 공정성에 근거한 영국 고유의 법 체계
    • CRS(공동보고기준): OECD 회원국 간 금융계좌 정보를 자동 교환하는 국제 협정
    • 주요 영국령 조세피처: BVI, 케이맨 제도, 버뮤다, 세인트키츠 — 모두 영국법 체계 적용
    요약: 12세기 신탁 개념에서 출발한 영미법의 소유권 분리 전통이, 오늘날 영국령 조세피처들이 차명 법인과 정보 비공개를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유로달러 시장과 미국의 조세피난처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영국 파운드화는 기축통화 자리를 달러에 넘겨줬습니다.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가 미국의 화이트에게 사실상 완패한 이 협정 이후, 파운드는 1950~60년대를 거치며 급격히 위상을 잃었습니다. 브레턴우즈 협정이란, 전후 국제 통화 체계를 달러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한 국제 합의를 말합니다(출처: IMF).

    그런데 영국이 그냥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들어 시티 오브 런던이 유로달러 시장을 장악하면서 금융 패권을 부분적으로 회복합니다. 유로달러란, 미국 국경 밖에서 유통되는 달러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미국 연준이 국내 달러는 통제할 수 있어도, 국경 밖에서 유통되는 달러는 제어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맹점이 있었고, 영국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냉전 시절 소련이 달러 패권의 직접 통제를 피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의 은행에 달러 자산을 예치한 것이 이 시장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시티 오브 런던을 거점으로 모든 유로달러 거래의 청산을 처리하면서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자국령 조세피처들은 이 구조의 파이프 역할을 했습니다. 전 세계 달러 자산가들이 절세와 소유권 은닉을 위해 BVI나 케이맨 제도로 자금을 보내면, 그 거래에서 발생하는 법률 자문료, 법인 설립 수수료, 세무 컨설팅 비용이 고스란히 시티 오브 런던으로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이 구조를 이해하고 나서야, 왜 영국이 식민지를 잃고도 그토록 오랫동안 국제 금융 중심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비로소 납득이 됐습니다.

    미국이 이 사실을 인지하는 데 대략 30년이 걸렸습니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연방정부는 유로달러 시장의 상당 부분이 영국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현실에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미국 본토 내 조세피처입니다. 델라웨어, 네바다, 사우스다코타. 이 세 주가 1980년대부터 영국령 조세피처와 유사한 법률 체계와 신탁 제도를 정비하면서 글로벌 자금을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은 OECD의 CRS 협정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출처: OECD 자동정보교환 포털). 즉, 해외 사법당국이 미국에 자산 소유자 정보를 요청해도 공조 의무가 없습니다. 반면 미국은 역외 관할권(Long-arm Jurisdiction), 쉽게 말해 달러 결제망을 이용하는 모든 해외 기관에 자국법을 적용하는 권한을 행사합니다. BNP 파리바가 달러 결제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미국에 약 14조 원 규모의 벌금을 납부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주는 건 안 주고, 받는 건 다 받겠다는 구조인데, 제 경험상 이런 비대칭 구조를 보면 언제나 패권의 민낯이 보입니다.

    그리고 미국 본토 조세피처에는 영국령에는 없는 추가 조건이 있습니다. 다이너스티 트러스트(Dynasty Trust), 흔히 왕조 신탁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자산을 한 번 신탁에 맡기면 최대 1,000년간 신탁이 유지되면서 수익이 후손에게 상속세·증여세 없이 이전됩니다. 여기서 다이너스티 트러스트란, 특정 세대에 국한하지 않고 수백 년에 걸쳐 자산을 후손에게 전달하는 미국 일부 주의 신탁 구조를 말합니다. 영국령 조세피처가 약 600조 원 규모의 자금을 유통시키는 동안, 델라웨어·네바다·사우스다코타 세 곳을 합산하면 그 두 배 이상의 자금이 유통되고 있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곳이 '조세피처'로 언급되는 걸 저는 이번에 처음 접했습니다.

    요약: 영국이 유로달러 시장과 영국령 조세피처로 달러 패권의 일부를 흡수하자, 미국은 1980년대부터 델라웨어·네바다·사우스다코타를 실질적 조세피처로 육성해 자금 흐름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테더(USDT) 본사가 BVI에 있는 이유가 뭔가요?

    A. 테더는 2025년 7월 발효된 미국의 GENIUS Act(지니어스 액트)가 요구하는 적격 스테이블코인 준비금 요건을 충족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본토에 본사를 두면 이 규정의 직접 적용을 받게 되므로, 정보 공개 의무가 없는 영국령 조세피처인 BVI를 본사 소재지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으로 보입니다. 자회사를 통한 미국 시장 진출은 별도로 진행 중입니다.

     

    Q. 서클(Circle)은 왜 델라웨어에 있나요?

    A. 서클은 GENIUS Act의 적격 준수 요건을 충족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로, 미국 법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영업합니다. 델라웨어는 미국 본토 내에서 법인 설립 절차가 간소하고 기업 친화적인 법률 환경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며, 동시에 CRS 정보 교환 협정 밖에 있어 해외로 소유권 정보가 유출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조세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선택으로 읽힙니다.

     

    Q. 미국이 CRS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A. CRS(공동보고기준)는 OECD 주도로 각국이 금융계좌 정보를 자동으로 공유하는 협정입니다. 미국은 이 협정에 가입하지 않아, 다른 나라 정부나 사법당국이 미국 내 자산 소유자 정보를 요청해도 공식적으로 제공 의무가 없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달러 결제망을 근거로 해외 기관에 자국법을 적용하는 역외 관할권을 행사합니다. 이 비대칭 구조가 미국 본토 조세피처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입니다.

     

    Q. 다이너스티 트러스트(왕조 신탁)란 정확히 어떤 건가요?

    A. 다이너스티 트러스트는 델라웨어, 사우스다코타 등 미국 일부 주에서 허용하는 신탁 구조로, 자산을 신탁에 맡기면 수백 년에 걸쳐 후손에게 수익이 배분되는 동안 상속세와 증여세가 부과되지 않습니다. 신탁 기간은 이론상 1,000년까지 설정이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신탁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전될 때 세금이 발생하는 것과 달리, 이 구조에서는 자산이 신탁 안에 머무는 한 과세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결론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달러 패권 이야기가 버뮤다 섬 하나와 12세기 십자군 원정과 연결된다는 구조 자체였습니다. 조세피처는 단순히 "부자들이 세금 피하는 곳"이 아니라, 영국이 파운드화 몰락 이후 유로달러 시장을 통해 금융 패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전략적으로 육성한 인프라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30년 만에 자국 본토 안에 더 강력한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테더가 BVI에, 서클이 델라웨어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가상자산 산업이 이 오래된 금융 지형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선택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를 보실 때, 각 업체의 본사 위치가 단순한 행정 주소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라는 시각으로 함께 살펴보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참고: https://youtu.be/Lp5F8WyCiJo?si=okJHRDa8KcET9p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