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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가 원전 부품을 만든다고 하면 처음엔 좀 어색하게 들립니다. 저도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배 만드는 회사가 왜 원자로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살펴볼수록 이건 단순한 사업 다각화가 아니었습니다. 빌 게이츠가 한국을 찾아 직접 협력을 다지는 이유, 그리고 두산에너빌리티와 HD현대가 테라파워의 핵심 공급망 자리를 꿰차게 된 흐름을 숫자와 맥락으로 따라가 봤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 나트륨 원자로
SMR(소형모듈원자로)이란 기존 대형 원전보다 출력 규모를 대폭 줄여 모듈 형태로 제작·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한 차세대 원자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대형 원전의 '소형화 버전'이지만, 그렇다고 성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안전성과 유연성을 높인 방향으로 설계된 개념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빌 게이츠의 방한 다음 날 오전, 테라파워 나트륨 원자로의 보호 용기와 구조물 등 핵심 기자재 제작 계약 체결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계약 금액은 보안상 비공개였지만, 이 계약이 성사되기까지의 과정이 저는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기업은 2024년 말에 기자재 제작 가능성을 검토하는 계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약 1년 반 동안 두산에너빌리티는 자사의 설계를 테라파워 원자로 규격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글로벌 원전 기업이 일방적으로 규격을 요구하면, 국내 업체가 맞춰가는 구조입니다. 이 과정 자체가 이미 테라파워 공급망 내에 깊숙이 편입됐다는 신호였습니다.
테라파워는 기존 경수로처럼 물이 아닌 나트륨(Natrium)을 냉각재로 사용합니다. 나트륨 냉각재 방식은 열전달 효율이 높아 더 높은 온도에서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고, 냉각재가 끓어도 압력이 크게 오르지 않아 안전성 면에서 이점이 있습니다. 다만 나트륨은 물과 접촉하면 폭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품 제작 정밀도와 소재 내구성 요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1년 반을 설계 수정에 투자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 계약 내용: 테라파워 나트륨 원자로 보호 용기 및 구조물 제작
- 협력 시작: 2024년 말 제작성 검토 계약 → 약 1년 반 설계 수정 작업
- 계약 금액: 보안상 비공개
HD현대, 조선 기술이 원전으로 확장
사실 저는 HD현대가 테라파워와 이렇게 깊게 엮여 있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조선과 원전,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산업 같지만 실제로는 공통분모가 꽤 선명합니다.
핵심은 정밀 가공과 용접 역량입니다. 선박이나 해양 플랜트를 건조할 때 요구되는 두꺼운 금속판 정밀 절단, 고압 환경을 견디는 용접 품질은 원자로 용기 제작에서도 동일하게 요구됩니다. HD현대 중공업은 이미 2024년 말 테라파워의 원자로 용기를 수주해 제조 중이며, 올해 5월에는 원자로 외함 시스템 부품의 우선 제조사로도 선정됐습니다.
여기서 외함 시스템이란 원자로 내부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격납 구조물 전체를 의미합니다. 원전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하는 만큼 소재 선택과 제작 공차(오차 허용 범위)가 극도로 엄격합니다. 이 자리에 HD현대가 '우선 제조사'로 이름을 올렸다는 건 테라파워가 품질을 검증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지난 1년 동안에만 빌 게이츠를 세 차례 만났고, 그 자리에서 매번 SMR 협력을 논의했습니다. 관계가 시작된 건 더 일찍입니다. HD한국조선해양이 2022년 테라파워에 3,00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전략적 협력 관계가 공식화됐습니다(출처: HD한국조선해양 공식 사이트). 투자에서 부품 수주, 우선 제조사 선정까지 3년에 걸친 신뢰 축적의 결과입니다.
메타 계약이 증명한 SMR 수요의 실체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SMR 관련 뉴스를 오랫동안 반신반의하며 지켜봤습니다. "2030년 상용화"라는 말이 몇 년째 반복되다 보니 실체가 없는 기대감 아니냐는 의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올해 1월 메타와 테라파워의 계약 내용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메타는 테라파워와 미국 내 최대 8기의 나트륨 발전소 건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우선 2기의 발전소 건설을 지원해 이르면 2032년까지 690MW의 전력을 직접 확보하고, 이후 최대 6기 추가 건설을 통해 2.1GW 규모의 전력을 더 확보하는 구조입니다. 메타 같은 빅테크가 전력을 직접 확보하기 위해 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는다는 건 AI 데이터 센터 전력난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AI 인프라 확충 과정에서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현상은 이미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글로벌 데이터 센터 전력 소비량은 2026년까지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전망입니다(출처: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저 전력(날씨나 시간에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을 24시간 확보해야 하는 데이터 센터 입장에서 SMR은 태양광·풍력으로는 채울 수 없는 수요를 메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대안에 가깝습니다.
SMR이 2030년 상용화 전까지의 공백을 채우는 방식도 제가 흥미롭게 본 부분입니다. HD현대는 선박용 엔진 발전기를 데이터 센터형으로 전환해 올해에만 미국에서 약 1조 6,000억 원 규모의 수출을 기록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 역시 가스터빈을 데이터 센터용으로 전환 공급해 미국에서만 누적 12기에 근접한 수주 실적을 쌓았습니다. 원전 상용화 전 과도기에도 두 기업이 수익을 내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와이오밍 캐머런 1호기와 한국 공급망의 위치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 1호기는 올해 4월부터 미국 와이오밍주 캐머런에서 본격 건설 중입니다. 목표 가동 시점은 2030년이고, ESS(에너지저장장치)와 결합 시 최대 출력 500MW까지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ESS란 발전된 전력을 저장해 뒀다가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에 추가로 방출하는 장치로, 원전에 ESS를 결합하면 피크 타임 대응 능력이 크게 올라갑니다. 500MW면 미국에서 40만 가구 이상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주목한 건 한국 기업들의 공급망 내 위치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보호 용기와 구조물, HD현대 중공업은 원자로 용기와 외함 시스템 부품을 담당합니다. 두 기업이 각각 1호기의 핵심 구조물을 맡는다는 건, 단순 협력사가 아니라 공급망의 뼈대를 이루는 위치라는 의미입니다.
다만 이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현재 계약 대부분이 1호기인 캐머런 1호기를 대상으로 합니다. 2호기 이후 추가 수주는 테라파워가 추가 계약을 발주해야 하는 별도 절차가 필요합니다. 정기선 회장과 빌 게이츠의 이번 회동이 그 시점을 앞당기고 협력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과도한 기대보다는 검증하는 시선으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제 생각에 이런 종류의 협력은 첫 호기 실적이 쌓인 뒤 후속 계약 확대 속도가 매우 빨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와이오밍 1호기가 예정대로 2030년에 가동을 시작한다면, 메타 계약의 2호기부터는 공급망 선정 속도가 훨씬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테라파워 나트륨 원자로는 기존 원전과 뭐가 다른가요?
A. 기존 경수로 원전은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반면,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Natrium)는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씁니다. 나트륨은 열 전달 효율이 높아 더 고온에서 안정적으로 운전할 수 있고, 냉각재 비등 시 압력 상승이 적어 안전 설계 면에서 이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ESS를 결합하면 전력 출력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데이터 센터처럼 안정적인 기저 전력이 필요한 수요처에 특히 적합합니다.
Q. HD현대가 조선 회사인데 왜 원전 부품을 만들 수 있나요?
A. 선박과 원전은 얼핏 달라 보이지만 대형 금속 구조물의 정밀 가공과 고압 환경 대응 용접 기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HD현대 중공업이 수십 년간 선박과 해양 플랜트를 건조하며 쌓아온 이 역량이 원자로 용기나 외함 시스템 제작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테라파워가 투자 유치 이후 실제 부품 수주까지 HD현대를 파트너로 선택한 배경입니다.
Q. SMR 상용화가 2030년이면 지금 투자하기엔 너무 이른 게 아닌가요?
A. 공급망 선점 경쟁이라는 특성상 실제 가동 몇 년 전에 부품사가 결정됩니다. 설계 수정과 인증 작업에만 1~2년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두산에너빌리티가 2024년 말 검토 계약을 맺고 1년 반을 설계 수정에 쏟은 사례가 그 단면입니다. 1호기 공급망에 들어와 있다는 건, 2호기 이후 확장 시 우선 협상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Q. 메타 말고 다른 빅테크도 SMR 계약을 하고 있나요?
A. 테라파워 외에도 여러 SMR 기업을 중심으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빅테크의 전력 직접 구매 협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AI 데이터 센터의 전력 수요는 태양광·풍력 같은 간헐성 전원만으로는 감당이 어렵고, 24시간 안정적인 기저 전력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이 가속화될수록 SMR 수요와 함께 부품 공급망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입니다.
결론
제가 이번 소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빌 게이츠라는 이름값보다, 실제로 계약서가 쌓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1년 반 설계 수정, HD현대의 3,000만 달러 투자에서 부품 수주까지의 3년 여정, 메타의 실제 발주.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시점이 지금입니다.
물론 2호기 이후 추가 수주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와이오밍 1호기가 2030년 목표대로 가동에 들어가는지 여부도 지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SMR은 실체 없는 기대"라는 시각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기선 회장과 빌 게이츠의 이번 회동 결과로 협력 범위가 어디까지 넓어질지, 저는 계속 추적해 볼 생각입니다.